대중 독재
대중을 독재정치의 피해자로 단순히 전제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지나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논문집이다. 실린 논문들은 "대중이 독재에 동의/협력/수용했다"는 테제를 말하고 있으며, 저자들의 의견의 강도가 서로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역대 많은 독재 정권에 동의에 기초한 대중의 전제정치 라는 요소가 있다는 데에 異見이 없다. 책은 서유럽, 중유럽, 동유럽, 동아시아의 순서대로 역사적인 파시즘 정권들을 훑어나간다. 스페인의 프랑코 체제, 프랑스의 비시(Vichy) 정부, 독일의 나치 정권,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파시즘, 한국의 박정희 군사정권, 소련의 스탈린 공산정권 외에도 우크라이나,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을 빠짐없이 다루고 있어서 일단 그 넓이가 눈에 띈다. 그러나 책은 전체적으로 독일의 나치 정권과 소련의 스탈린 정권에서의 대중의 반응에 집중하고 있는 편이다. 농민들과의 직접 면담이 돋보이는 「박정희 체제의 지배 담론과 대중의 국민화」를 예외로 하면, 대부분의 논문들은 각 파시즘/독재 정권에 대한 연구사를 잘 정리하고 있다. 독재 체제가 붕괴한 후에 그것을 연구한 결과물은 처음에는 독재 정권을 맹렬히 비난하고 공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反신화 는 민주 정권 의 도덕성의 이해할만한 표출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연구들은 주로 독재 정권의 무자비한 억압과 처벌의 야만성을 드러내 보이고 관련자를 밝혀내는 데 치중한다. 대중은 피해자 가 되며, 신화적인 저항 투사의 이미지들이 만들어진다. 물론 사람들은 억압적인 독재 체제에 저항하기도 했다. 러시아 농민들은 토지의 집단화 정책에 반발하여 수천 번이 넘는 소요를 일으켰으며, 많은 노동자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소극적으로 빈번히 저항했다. 노동자들의 태업, 어용 청소년단 성원들의 탈선, 우생학적 인종정책을 위한 보조금 정책의 실패, 금지된 문학과 음악의 지하 유통과 같은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정부는 대중을 억압한다. 군사 정권은 계엄령을 남발했으며, 언제나 비상시국 이 강조되었다. 강력한 비밀경찰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고, 사석에서 말 한 마디도 마음 편하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의 감시는 일상생활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그러나 비밀경찰의 강력한 힘은 그 자체에서만은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수천만 명을 1~2만 명의 비밀경찰이 직접 다 감시할 수는 없다. 독재 체제를 유지시켜준 비밀경찰의 효과적인 통제의 힘은 의심하고 밀고하는 자들, 즉 대중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보통 사람들 이 독재 정권의 협력자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문제의식이 책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체제에 순응한 보통 사람들 이 체제에 대한 합의의 뜻을 품고 있었는지, 두려움으로 인해 마지못해 참고 견딘 것인지 단정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충성과 저항의 단순한 이분법은 역사를 여실히 보여주는 척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과거사 청산 문제가 접한 어려움도 바로 여기에 있다. 처벌의 범위와 그 기준은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들 순응하고 살아간 시대에 누구를 어떤 기준으로 단죄할 것인가? 단죄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무언의 면죄부가 주어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사법적 처벌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실수와 오해가 개입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작은 죄가 크게 부풀려지거나 큰 죄가 묻힐 수도 있다. 2차 대전 후 독일의 나치 청산 문제와 프랑스의 부역자 처벌 문제에서도 이런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다고 전혀 과거를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는 것 또한 정치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에 흠이 되며 시간이 갈수록 더 큰 균열을 가져올 수 있다. 나치와 그에 대한 협력체제들은 공공연한 인종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로 인해 異意 없이 청산되었으나, 책에서 언급된 것들 외에도 오래 지속된 독재 또는 파시즘 체제들이 대립되는 평가를 받으면서 청산되지 않고 있다. 『대중독재』는 독재 정권 하에서의 대중의 모습을 좀 더 다각적으로 신중히 살펴볼 것을 제안하는 기획이며, 학계에서는 그다지 새로운 제안이 아니지만 현재 한국의 현안 문제들과 겹쳐지면서 단행본으로서는 상당히 의미 있는 기획이라 할 것이다.
독재와 민주주의, 좌파 독재와 우파 독재를 불문하고 모든 권력 체제의 성공 여부는 구성원들이 해당 체제의 정통성을 얼마나 인정하는가에 달려 있다. 체제의 정통성을 마련하는 가장 정교한 정치공학이 바로 대중의 합의와 동의――그것이 자발적이건 강제된 또는 조작된 동의이건――이다. 권력을 독점한 사악한 소수가 폭력과 강제를 행사해 다수의 무고한 민중을 억압하고 지배했다는 흑백 논리나 폭력과 억압을 통한 강압적 지배라는 단색적 이미지로 포착하기에는 근대 독재의 현실은 매우 중층적이고 복합적이다. 이에 이 책은 강제와 동의라는 기제를 바탕으로 형성된 대중독재의 지형도를 올바르게 그려냄으로써 ‘독재’라는 개념에 대중의 동의를 얻어내고 자발적 동원 체제를 만들어내는 다양하고 정교한 헤게모니적 장치들이 내장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대중독재 체제를 살아내야만 했던 동시대인들을‘집합적 유죄’라는 틀로 재단하지 않으면서, 그 과거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사회적 기억을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이다.
프롤로그 : 대중독재의 지형도 그리기 - 임지현
1. 서유럽 역사에서 나타나는 대중독재
이탈리아 파시즘 - 강제적 동의에서 문화적 동의로 - 김용우
비시 프랑스 - 민족 혁명의 이상과 현실 - 신행선
프랑코 체제와 대중 - 황보영조
독일과 영국의 총력전 체제 - 스테판 버거
2. 중유럽 역사에서 나타나는 대중독재
나치의 민족 공동체 - 새로운 정치 질서 - 미하엘 빌트
나치 독재의 정치종교와 전체주의적 대중 만들기 - 나인호
대중에 대한 독재 또는 대중에 의한 독재? - 나치 독재의 대중적 기반 - 김승렬
강제와 동의 - 동독 - 마르틴 자브르
강제와 복종에서 강제와 동의로
희생된 사람들에서 국민화된 희생자들로? - 오스트리아 민족 사회주의와 민족 기억문화 - 미즈노 히로코
3. 동유럽 역사의 경험을 통한 대중독재
스탈린 체제에 대한 대중의 지지와 저항 - 박원용
스탈린주의와 소비에트 사회 - 알렉산드르 골루베프
비주얼 이미지를 통해 본 스탈린주의의 성격과 담론 - 이종훈
현대 우크라이나 역사 서술에서의 강제 대 동의 - 볼로디미르 크라프첸코
희생자인가 공범인가 - 카타지나 소볼레프스카 미실리크
4. 우리나라와 일본의 체제
박정희 체제의 지배 담론과 대중의 국민화 - 황병주
일본의 총력전 체제 - 그 통합과 동원에 내재하는 모순 - 나카노 토시오
에필로그 : 독재의 정당화 독일의 나치와 공산주의 지배는 어떻게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냈는가 - 콘라트 야라우슈